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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 111호/OUTSIDE CAMPUS

타율 4할, 이치로 한국상륙작전








스즈키 이치로 (출처: MLB.com)

 “이치로가 한국에서 뛰면 4할은 그냥 칩니다.”


 스즈키 이치로(41‧뉴욕 양키스)가 미국 야구계를 맹폭하던 시절. ‘MLB파크’와 같은 메이저리그 팬 사이트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주장이다. 지금이야 새치가 희끗한 노장이 된 이치로지만 한창 때의 그는 분명 리그 제일의 수위타자였다. 2001년 데뷔 이후 10년 연속 3할-200안타를 기록했으며 2004년에는 한해에만 262안타를 때려내며 단일시즌 최다안타라는 경자탑의 주인이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장 수준 높은 리그인 MLB에서 0.350 이상의 고타율을 밥 먹듯 쳐댄 이치로인데, 한국에서라면 못해도 한 시즌 정도는 타율 4할을 달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추론이 도출될 수 있었다. 물론 WBC를 계기로 한국 팬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던 이치로인지라 그가 한국 야구를 씹어 먹을 거란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진 못했다.


 야구팬들이 메이저리그의 ‘뛰어난 누군가’가 한국에 오면 4할을 기록할지 모른다는 발상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리그를 뛰고 있는 선수들 중에선 도무지 4할의 경지에 오를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현수(26‧두산 베어스)나 김태균(32‧한화 이글스) 같이 4할의 언저리를 배회한 타자는 몇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 야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 4할 타자는 아무도 없었다. 프로와 아마가 혼재했던 82년 원년, 일본 야구 출신의 베테랑 백인천(71)이 80경기를 뛰고 기록한 .412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태껏 남아있다. 메이저리거들의 실력을 TV로 실시간 관람할 수 있는 오늘날의 팬들이 수많은 if를 만들어내는 이유도 여기 있다. ‘만약 트라웃이 롯데에 오면, 본즈가 엘지에 가면, 기아가 푸홀스를 영입한다면…’ 태동기 한국 야구를 평정한 백인천의 위엄을 이들이 재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냉동인간 윌리엄스와 달팽이인간 굴드


 뛰어난 누군가에 대한 환상이 한국 팬들만의 독특한 생각인 건 아니다. 메이저리그는 2차 대전 이래 최고의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1953년 마지막 4할을 기록한 이후 60년이 넘도록 4할 구경이 요원했다. 이에 대한 미국 팬들의 환상은 사뭇 ‘오싹’했다. 2002년 윌리엄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족을 비롯한 일부 야구팬들은 이런 식의 주장을 했다. ‘테드의 시신을 냉동보관 해야 한다. 언젠가 죽은 사람을 살릴 방법이 개발되면 그를 해동시켜 그 뛰어난 신체능력을 분석할 수 있다. 그럼 야구계는 다시금 4할 타자가 활약하는 좋았던 옛날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으스스한 말은 현실이 되었다. 윌리엄스의 시신은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채 액화질소 속에 냉각됐다.


테드 윌리엄스, 스티븐 제이 굴드 (왼쪽부터)


 윌리엄스가 냉동인간이 된 2002년.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이름의 남자가 같은 해 명을 달리했다. 뉴욕 양키스의 광적인 팬으로 유명했던 굴드는 사실 이보다는 생물학자로서, 리처드 도킨스와의 오랜 논쟁으로 더욱 유명한 과학자였다. 물론 야구팬들에게는 4할이 실종한 이유를 리그의 질적 상승에 따른 실력의 평균화로 풀이해낸 인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생물학자들은 한 동물의 번식과정을 지켜보는데 평생을 할애한다. 굴드의 연구대상은 서인도제도의 달팽이였다. 달팽이의 교배행각을 수십 년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그는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종의 분화 즉 진화가 일어난 뒤에는 아주 긴 안정화 상태가 찾아온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견은 진화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정한 비율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다윈의 오랜 학설을 수정했다.


 이렇게 굴드가 달팽이를 통해 진화론을 발전시키는 동안 미국 야구계는 4할 타자가 실종된 이유에 대해 분석하고 있었다. 8-90년대 당시 야구계 여론은 과거에 비해 실력이 떨어진 타자들을 탓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타이 캅, 스탠 뮤지얼, 로저스 혼스비 등의 대(大)타자들이 활약하던 10-20년대에 비해 요즘 타자들은 덩치만 컸지 머리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냉동인간 테드 윌리엄스도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새 타자들이 멀리 때리는 건 잘해도 수비수 사이로 타구를 보내려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슬라이더와 같은 구질이 개발되어 피칭이 향상되었다거나 글러브가 좋아져 수비가 쉬워졌다든지 혹은 과거에 비해 가늘어진 배트 때문에 공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등의 변화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름의 합리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굴드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우선 4할 타율을 타격 수준의 지표로 여겨선 안 된다고 봤다. 오늘날의 타자는 운동능력을 타고난 엘리트들이다. 또한 체계적인 타격법을 훈련하며 프로의식에 입각해 철저히 몸 관리를 한다. 그런데도 동네에서 좀 친다는 사람을 데려와 경기를 시켰던 과거에 비해 실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피칭과 수비가 발전을 이룰 동안 타격만 홀로 정체 내지 퇴보했다는 것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굴드는 현대야구가 자리 잡은 20년대 이후부터 평균 타율은 극적인 상황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260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점, 최고타율과 최저타율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좁혀지는 점 등을 들어 오늘날의 타자들은 세간의 평과는 달리 상당한 질적 상승을 이루어냈다고 주장했다. 어중이떠중이가 더러 있던 과거의 야구에서는 뛰어난 누군가의 활약이 4할이라는 기록으로 도드라질 수 있었지만 오늘날 같이 모든 선수가 일정 수준 이상을 보이는 시대에는 뛰어난 누군가의 활약이 평범한 선수들의 기록과 견줘 크게 돋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달팽이 연구는 진화 이후의 오랜 안정화 상태를 보여준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체계적인 육성은 선수들을 신체능력의 한계 근처까지 몰아붙인다. 그 결과가 평균 타율 .260인 셈이다. 그는 이 인간의 한계를 ‘오른쪽 벽’이라 불렀다. 육상 단거리 기록이 9.00대를 수십 년 동안 벗어나지 못한 이유이다. 오른쪽 벽에 닿게 되면 기록의 향상은 더뎌지며 일정한 수준에 고착되는 양상을 보인다. 결국 굴드는 현대 야구의 평균적인 수준이 오른쪽 벽에 다다르면서 뛰어난 누군가와 저조한 누군가의 격차가 줄어든 것이 4할이 사라진 궁극적인 이유임을 역설한 것이다.


벽을 넘어서


 올 한해는 팔꿈치 인대가 끊어져 접합 수술을 받아야 했던 선수가 거의 서른 명에 육박한 일명 ‘토미존 대란’이 야구계의 커다란 화두였다. 한번 받으면 1년가량을 재활에만 매달려야 하는 큰 수술이다. 인대파열 전염병이라도 나돌았던 걸까? 외과에도 전염성 질환이 있었던가. 어떻게 한 해에만 이렇게 많은 인대들이 끊어져 나간 걸까? 인대접합수술의 최고존엄 중 한 명인 닥터 제임스 앤드루스는 이렇게 단언한다. 투수들이 너무 빠른 공을 던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12년간 선발투수들의 평균 구속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2002년에는 89.5마일(144km)이었던 평균구속이 2014년 올해에는 91.4마일(147km)로 증가했다. 앤드루스 박사는 85마일(136.8km) 이상을 투구하면 팔꿈치 인대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해 큰 스트레스가 가해진다고 경고한다. 그와는 무관하게 메이저리그의 투수육성법은 좀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방로를 찾아 발전해왔다. 토미존 대란은 어쩌면 평균적으로 150km에 육박하는 공을 던질 수 있는 오늘날 투수들이 인간 신체능력의 한계, 즉 오른쪽 벽에 가닿았음을 뜻하는 징표가 아닐까.


 그러나 야구의 역사는 막힌 벽을 우회하려는 몸짓으로 가득하다. 흔히들 왼손 선수가 오른손 선수보다 유리하다고 한다. 홈에서 1루까지 달릴 때 왼손잡이 주자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으며, 공의 입사각을 이유로 우투수의 공을 더욱 잘 공략할 수 있다는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이유가 중요하다. 우완이 좌완보다 훨씬 많은 상황에서 우타자는 양완 모두를 공략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완 공략에 이점이 있는 좌타자는 좌완에 고전하더라도 그 수가 비율적으로 적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적이 보장된다. 인구학적으로 오른손잡이 대 왼손잡이의 비율은 9:1이지만 타자들의 경우 7:3 내지 6:4 정도로 좌타자의 수가 일반에 비해 많은 이유가 여기 있다. 이치로, 김현수, 최형우(31·삼성 라이온즈), 박용택(35·LG 트윈스) 등의 좌타자들은 원래 오른손잡이였다. 왼손 선수가 야구에 유리하기 때문에 좌우를 바꾼 것이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조금이나마 빗겨가기 위해서 말이다.


 수비수 위치이동(shift)은 바로 이런 좌타자들을 위해 고안된 전략이다. 테드 윌리엄스 쉬프트가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사례일 텐데, 그 당시 감독들은 윌리엄스가 공을 극단적으로 잡아당기는 타자라는 점에 착안하여 수비수들을 1루 방면으로 배치한다면 그를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물론 테드는 수비수에게 공 잡을 기회조차 허락지 않았다. 그의 타구는 담장을 넘겨버렸지만, 쉬프트는 오늘날 좌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편화되었다. 우타자의 경우 아웃을 잡아내야 하는 1루수가 3루 방면으로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에 잘 쓰이지 않지만 좌타자의 경우 쉬프트는 아주 효율적인 수비방법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활용성이 오죽하면 야구 저널리스트 톰 버두치는 본래 수비 영역을 훨씬 벗어난 쉬프트는 반칙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올해 8월 30일, LA다저스는 샌디에고 파드레스를 상대로 '내야수 벽'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쉬프트를 시도했다. 결과는 성공. 그러나 후속 타자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사진 출처: 블리처리포트)


 이렇듯 오늘날의 야구는 벽을 우회하려는 자와 우회하지 못하게 하려는 자의 투쟁이 빚어내는 정반합이 되었다. 그 덕에 우리는 야구의 앞날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게 됐다. 인대손상이 두려운 미래의 투수들은 빠른 공을 포기하는 대신 단기간에 너클볼을 터득하는 법을 배우려 할지 모른다(너클볼은 10년을 연습해도 구사하기 어렵다). 밀어치지 못하는 좌타자에게 배석된 자리 역시 없을 것이다. 좌타자의 수가 줄어들면 자연스레 좌타자에 유리한 좌완도 줄어들 것이다. 리그에는 우완 투수들이 득시글거리고 우타자들은 매일 죽을상을 짓고 있을 터다. 리그의 득점력이 떨어지고 사무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좌측방면거리가 짧은 구장을 지으려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전부 글쓴이의 망상이다. 하지만 야구계 대기자 레너드 코페트가 말했듯 야구는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하며 지켜보는 데’ 묘미가 있다. 좋았던 옛날의 뛰어난 누군가를 그리워 할 필요는 없다. 이치로 한국상륙작전보다, 냉동인간의 부활보다 더욱 역동적인 변화가 이미 야구 그 자체 속에 각인되어 있다.